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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신문에 연재되는 국선도무예협회 최종 덧글 0 | 조회 8,042 | 2014-06-02 20: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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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국선도의 보급(최종회)
기사입력: 2014/05/31 [10:27]  최종편집: 무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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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후 국선도무예협회 총재
▲박진후 국선도무예협회 총재 © 무예신문

청산선사가 처음 국선도를 보급할 때는 도법, 선법이라 했다. 수련장을 만들게 되면서 정각도로 부르다가, 지난 1971년 2월 문교부에 정신도법 연구회로 등록했다. 후에 정각도 수련단계를 넘어서는 회원들이 생겨났다. 정각도와 그 다음 수련 단계인 통기법을 아우르는 명칭이 필요해 ‘국선도’라 부르게 되었다.

문화평론가 박정진의 말을 빌리면 국선도는 현재 6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종목이다. 무현도인 → 무상도인 → 무운도인 박봉암 → 청운도인 이송운 → 청산선사 고한영 → 청원 박진후, 청화 김종무, 청해 김단화 3인까지 6대이다. 청원 박진후가 제자를 기르고 있으니 7대가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 정통 선맥을 이은 청산선사는 1965년에 청원 박진후를 최초의 산중제자로 받는다. 청원이 청산선사를 만난 것은 65년 말이다. 16살 청원은 어느 날 동두천 근처에 지인을 찾아온 청산선사와 인연이 이어졌다. 한참 도와 무술에 관심이 많던 차에 주위 사람들이 청산선사를 보며 도인 오셨다고 하니 어린 청원은 호기심이 생겼다.

집에 청산선사가 찾아와서 ‘가자’하니 청원은 훌쩍 짐을 싸서 따라 나섰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청원은 아버지의 정이 그리웠던지 아버지처럼 청산선사를 따랐다. 청산선사는 어린 청원을 강원도 깊은 산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암자에서 지내기도 하고 화전민촌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도인의 가르침을 받아 어린 청원의 호기심을 채우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이렇게 해봐’하며 동작을 보여주면 따라해야 했다. 처음에 가르쳐 줄 때 잘 보고 배워야지 다시 보여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청산선사는 청원의 마음과 몸의 상태를 두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하여, 게으름을 피우면 불호령이 떨어졌기에 수련에 있어서는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1967년 충청남도 천안 태학산 해선암에서 1차로 산중에서의 수련을 마무리하고 서울 인왕산 삼왕사로 자리를 옮긴다. 청원과 더불어 하산한 청산선사는 67년에 삼왕사의 주지로 있던 최거사의 도움으로 1967년 문공부 개인등록 3호로 등록하며 국선도 보급을 구상한다.

68년 1월 청원은 태력산으로 알려진 청화 김종무를 만나면서 2차 수련 산중수련 시기를 갖는다. 곧 이어 철선녀로 이름을 떨친 청해 김단화를 데려와서 현대국선도 최초의 산중제자 3인이 다 모이게 되었다. 청원은 삼왕사에서 수련에 매진하고 막내 사제인 청해 김단화를 지도하며 한편으로는 이들과 국선도 대중화를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3.1운동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갑성 옹으로부터 3.1절을 기념하여 국선도 시범을 ‘민족정기 선양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를 제의 받았다. 뜻 깊은 행사라 생각되어 청산선사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본 행사를 앞두고 69년 2월초 광화문사거리 교육회관 6층 대강당에서 무예인 경연대회에 참가하였다. 민족정기 선양대회를 계기로 청산선사, 청원, 청화, 청해는 크게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유명세는 탔지만 국선도 보급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국선도는 그 뒤로 일 년 넘어서 70년 4월 20일에야 최초의 수련원을 열게 되었다.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옆 팔진옥이 위치해 있는 건물 4층이었다.
3.1운동 50주년 ‘민족정기 선양대회’의 시범이 계기가 되어 일본 후지 TV는 국선도를 일본으로 초청하기 위해 애썼다. 청산선사는 계속 거절을 하다가 최초의 수련원을 열고 난 후에야 초청을 받아들였다. 병역을 마치지 못한 청원은 수련장을 지켜야 했다.

일본 시범에 성공하고 나자 국내TV 및 신문, 주간지, 잡지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었다. 국선도는 각종 언론에 기사화되면서 유명해졌고 수련원에는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련장에서 숙식을 하던 청원은 새벽에는 수련을 위하여 삼왕사까지 뛰어가고 회원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다시 뛰어오는 고단한 날들이 반복되었다. 또 국선도 시범과 강의를 요청하는 곳이 많아졌고 강의와 시범을 병행 할 때는 청산선사가 강의를 하고 청원을 중심으로 시범이 이루어 졌다.

71년, 최근까지 국선도의 본원으로 사용되었던 종로3가 백궁빌딩에 수련원이 자리잡았다. 병역을 다하지 못해 일본 시범공연을 놓치게 된 청원은 군대를 빨리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해군에 입대한다. 언론에 많이 알려 지기도 했고 또 당시 해군참모총장이 수련 회원이어서 청원에게 군대에서도 수련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74년 3월 전역한 청원은 바로 백궁빌딩의 국선도 본원에서 수석 법사로 임명되어 회원지도를 총괄하게 된다. 그 후 76년 미국 국선도 시범단에 합류한다. 75년 후버댐 18분 잠수 시범으로 청산선사가 화제를 몰고 다니고 미국에서 국선도 지도자 파견요청이 들어오던 시기였다. 미국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청산선사와 청원은 귀국하고 청화 김종무는 미국에 남아 국선도 보급을 맡았다.

국선도를 대중화 하면서 청산선사는 차츰 국선도에서 무예부분인 외공을 줄이고 호흡을 통한 심신 수련에 중점을 두어 보급했다. 애초에 무예시범을 한 목적이 단전호흡을 통한 심신 수련법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청산선사는 강의에서 국선도는 우리 고유의 선사상과 심신수련법임을 강조하며 단전호흡과 기에 대한 강연을 이어갔다. 청산선사의 강의는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 큰 관심을 이끌어냈다.

국선도가 반석위에 앉아가던 1978년 영등포 수련원 지도하던 청원은 국선도를 잠시 떠나게 되었다. 몇 년 후인 1984년 청산선사는 재입산 하게 되고 국선도무예는 대한민국 무예계에 전설처럼 남게 되고 차츰 대중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잊혀져가던 전설인 국선도무예는 2008년 청산선사의 첫 번째 산중제자 청원 박진후가 국선도 무예협회를 발족하면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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